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문유석 작가의 책, 나온지는 조금 돼서 신간이라고 하긴 무색하지만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그 나이대같지 않은 신선한 사고방식에 감동을 했었기에 이번 책 역시 기대하며 읽었다. 초록색과 파란색으로 이루어진 세련된 표지와 공존에 대해 말하는 내용과 맞는 우산을 씌워주는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판사를 그만두었다고 알고있는데 악마 판사와 같은 드라마를 보면 직업의 무게를 집어던지고(?) 신나게 글을 쓰고 계신 것 같다. 왜 우리가 항상 가중처벌해달라고 말하는 성폭력 범죄자들이 죄에 비해 미미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지, 정의와 자유 속에서 적정선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에 대해 법적인 관점으로 설명 혹은 회유(?)를 하는 내용인데, 공감은 가지 않지만 인정하게 되는 부분과 공감가는 부분, 원론에 가까운 내용으로 지루했던 부분(개인적으로 후반부가 그랬다.)도 있었다. 법에 관한 내용이라 딱딱해질 수도 있었는데 유머와 유려한 글솜씨로 잘 풀어낸 책인 것 같아 비문학 좋아하고 사회이슈와 법에 관심있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심지어 '알쓸신법'도 생각해봤고,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교도소 구내 음악으로 늘 나오던 노래에 영감을 받은 '법은 어렵지 않아요'도 있었으며, 이왕 이리 된 거 갈 데 까지 가보자는 맘으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법을 공부할 용기를 낼 권리의 온도'도 잠시 생각해보았다." p.10 프롤로그
이 부분에서 진짜 빵터졌다. 온갖 베스트셀러 다 모아놓은 제목이라니... 이런 과정에 비해 책 제목은 잘 지은 것 같다ㅋㅋㅋ
"반면, 사형폐지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는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다. 그는 1764년 출간한 저서 '범죄와 형벌'에서 사형은 유용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범죄에 대한 억제력 측면에서 볼 때 사형의 효과는 일시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망각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를 박탈당한 채 평생 짐 나르는 짐승처럼 취급받고, 자신의 노동으로 사회에 끼친 손해를 속죄하는 범죄자의 모습을 오래 보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인 억제책이라는 주장이다." p.50 이제 질문을 바꿔야한다ㅡ사형제
"자유는 스스로 무장하여 압제자와 싸운 이들에게만 보장되었다. 남을 위해 피 흘리며 싸우는 인간은 드물다. 이후의 역사를 통해 자유의 주체가 확장된 것은 인류가 저절로 고결하고 이타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 아니다. 전선이 확대되고 스스로 무장하여 싸우는 자들의 범위가 넓어졌기에 전리품을 향유하는 주체도 늘어난 것이다." p.93 '자유'의 연대기
"문제는, 역사적으로 '자유'란 현재 상태에서 누가 내 발목을 잡지만 않으면 내 능력껏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계층의 욕구라는 점이다. 모든 사람들이 방해만 없으면 행복을 추구하며 잘살 수 있는 사회라면 자유만으로 충분하게 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류는 아직 한 번도 그런 단계에 도달해보지 못했다." p. 94 '자유'의 연대기
"예시를 바꾸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강요되는 '옳음'이 지금 시대에 한창 인기 있는 것이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성평등이든, 소수자 보호든, 동물권이든, 환경 보호든, 일본 상품 불매든, 그 어떤 가치라 해도 이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엿보고 폭로하고 낙인찍고 너의 생각을 밝히라고 질문을 해대는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개인의 마음 속은 절대적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내심의 자유라고 한다." p.102 유별날 자유, 비루할 자유, 불온할 자유
"인간에게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를 주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고, 위험하다. 역사를 통해 그것을 깨달은 만큼 겪었으면서도 자꾸만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현실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p.108 유별날 자유, 비루할 자유, 불온할 자유
책에서 가장 공감이 갔던 목차다. 요즘 많이 보이는 '혐오' 양상이 남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데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의 이 부분이 그 부분을 매끄럽고 직접적으로 지적했다는 생각이 든다.
"수백만 년의 역사상 처음으로 갑자기 먹거리 과잉의 시대에 놓이게 된 것처럼, 휴대폰의 발명과 소셜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간은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규모로 타인들의 삶에 노출되었다. ··· 우리가 가진 원시인의 몸이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상대는 원래 수십 명 단위로 세팅되어 있는데 수천, 수만, 아니 어쩌면 수억명 단위까지 우리 시야에 가깝게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쯤되면 이건 축복이 아니다. 공해다." p.124 인간이라는 이름의 공해
"그런데 지금은 일면식도 없는 ,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어두운 면들이 쉽사리 내 눈에 들어온다. 인간의 밑바닥이 궁금하면 자기 자신의 솔직한 바닥부터 들여다보면 될 일인데 왜 불특정 다수의 밑바닥을 굳이 접하며 살아야 할까? '밑바닥 페티시즘'인가? 이제는 '알권리'보다 '모를 자유'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p.127 인간이라는 이름의 공해
"SNS는 인생의 낭비다."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넘치는 tmi 속에서 '모를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참 와닿았다.
"타임뱅킹이란 사람들이 자기 시간을 들여 여러 봉사활동을 하며 공동체 내에서 신용 포인트를 쌓은 뒤 그 포인트, 즉 시간을 교환하는 제도로, 빈곤퇴치 운동가로 활동하던 에드거칸 교수가 시작하여 현재 미국 여러지역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 앤드루 양은 이를 더욱 확장하여 실제 금전적 가치까지 얻을 수 있는, 중앙정부가 후원하는 강화된 타임뱅킹 제도를 제안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신용(Digital Social Credits, DSC)이라는 새로운 통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타인을 돌보고 돕는 일, 환경을 개선하는 일 등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일을 할 때마다 정해진 DSC를 획득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구축하고, 이 포인트는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부동산 부자는 욕을 먹지만 DSC 부자는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 p.246 인공지능 시대의 평등
이 부분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내용이라 신선해서 북마크 해두었다. 사회신용이 개인의 자산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