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한 켠

정지음,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현타토끼 2022. 5. 15. 13:58

 『젊은 ADHD의 슬픔』 작가 정지음이 쓴 책이다. 요즘 상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성인 ADHD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나도 혹시...?' 의심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나도 문제의 그 체크리스트를 해봤는데 70퍼센트는 해당되는 것 같아서 불안해진 마음으로 성인 ADHD에 관한 책을 찾다가 정지음 작가를 접했고, 알라딘에서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미리보기를 읽고(심시티 부분이었음) 재미있어서 두 권 모두 읽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젊은 ADHD의 슬픔』은 읽으면서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힘들고 괴로운 나머지 1/3을 남기고 읽다가 포기를 했다. 그리고 느낀 점은 나는 성인 ADHD가 아닌 것 같고 뇌의 노화때문에 핸드폰을 찾다가 생의 1/3을 낭비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좀 더 가볍고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술술 읽혔다. 정지음 작가의 성장과정과 연애사를 보고 나랑은 너무 반대되는 사람이라 (나혼자) 마음의 거리가 오조오억광년 멀어질 뻔 했지만, 읽다보니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나혼자) 다시 가까워졌다. 친구들이랑 술먹고 한 대화(a.k.a. 롤링)라던가 트위터 중독 부분은 진짜 폭소하면서 읽었다. 그리고 일찍 암으로 세상을 떠난 '영주에게' 부분은 덤덤하게 편지를 쓰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서 참 슬펐다.

 

 "사람들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알지 못하니 가질 수도 없다. '나'와 '너', '우리'의 경계에서 빈손으로 헤맬 뿐이다. 이것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결핍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끝없는 가능성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의 빈손은 잠시 악수를 나누는 동안 충만해진다고, 두 손바닥의 냉기가 맞닿아 온기가 되는 거라고 믿는다." p.7 들어가며

 "그래서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그들을 사랑하는 만큼 자주, 너 자신이 놓여 있는 그 밥상을 발로 차라고 권하게 되었다. 먹히느니 차라리 아무도 못 먹게 먼지와 때를 묻히라는 의미였다. 이 방법은 도덕적 최선이 아니라는 면에서 최고였다." p.20 이상한 사람의 못된 행복

 

 "심들은 세금을 냈지만, 지불하는 푼돈에 비해 너무 큰 권리를 주장하곤 했다. 나는 급기야 새벽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놈들아, 나 정도면 착한 시장이거든? 싫으면 다른 도시로 가라고!"라고 외치기에 이르렀는데, 막상 이 말을 뱉고 나서는 소름이 돋았다. '와우, 이것이 바로 그동안 내가 만났던 사장들의 마인드로구나!'라는 깨달음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p.23 나는 심이다

 

 회사와 한때 꽤 큰 싸움(?)을 해 본 경험 있는 사람으로서, 그 심보와 사고방식이 참 이해가 안됐었는데 심시티 시장의 마인드로 생각하니 갑자기 명쾌해졌다. 직장과 나 분리하기, 처음에 입사했을 때는 이게 참 어려웠다. 회사에서의 내 인생과 그밖에서의 인생을 분리할수록 삶의 질이 올라가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 같다. 작가가 회사 안의 자신을 심이라고 표현하는게 재미있었다.


 "전 애인 중 한 명은 나와 몇 개월 사귀어본 후, 내가 너무 과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어찌나 엄중하게 선언하는지 나는 그가 내 남친이 아니라 제우스쯤 되는 줄 알았다. 신탁같은 헛소리의 의중을 묻자 내가 보통 여자들에 비해 기가 세다는 대답이 따라왔다. 항상 본인 말에 너무 많은 대답을 한다는 것이었다." p.32 쌍방과실

 

 왜 여자에게만 기가 세다는 말이 붙는 걸까. 남자들이 기가 저렇게 약해서야. 쯧쯧...


 "하지만 '성급한 과몰입의 실패'란 개념은 그 후로도 여러 번 적재적소의 브레이크가 되어주었다. 실패로 여겨지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이것이 나라는 인간의 실패인지, 아니면 나의 고질적 습관 '과몰입'의 실패인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돌이킬 수 없는 실패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고착화된 '습관들'의 사소한 실패였고, 해결을 위해 나 자체를 뜯어고칠 필요도 없었다." p.43 성급한 과몰입의 실패

 "나는 마침내 내가 그리 착하지 않음을 인정했다. 그렇다고 너무 나빠지지도 않으면서, 허무맹랑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 프로젝트를 폐기했다. 다음으로는 농담을 배워갔다. 회사에서는 흔쾌히 수락하는 말보다 무사히 거절하는 말들이 더 값지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p.52 아낌없이 주는 나무(절망편)


 "상황은 천천히 그러나 나쁘게 튀었다. 내 감정을 억압하며 모든 타인을 긍정하자, 나를 만만히 여기는 사람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당시엔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나를 누군가가 함부로 대하리란 생각을 못 했다. 사람을 믿어서가 아니라 새의 추상적 진리를 믿기 때문이었다. 노력하는 자에게 영광이! 노력만을 믿느라 노력에도 종류가 많고, 어떤 노력은 틀린 결과를 불러온다는 걸 고려하지 못했다." p.70 인생 개혁 프로젝트의 종말

 

 한국식 사회생활이 정말정말 맞지 않는 사람으로서 거절을 제대로 잘 못하면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너무 뼈져리게 깨달았기 때문에 작가의 상황이 공감갔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감당 못하는 부분은 거절하기.


 "어떤 비든 몇십 분의 집중 상태와 몇분의 소강 상태가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해가 떴다. 그렇다면 비가 내포하는 미래가 햇살이라 봐도 좋을 것이었다. 그런 점이 인간관계와도 닮아 있었다. 어떤 사이 얼마만큼의 갈등이든 잠깐씩 햇살이 비치거나 물살이 희미해지는 순간이 존재했다. 그 사실을 수용하거나 외면하다 보면, 버티거나 보내주다 보면, 시간이 흐른 후 마지막은 어쨌든 맑음이었다." p.86 비 내리는 날

 

 인간관계로 힘들 때 맘 속으로 항상 되뇌인다. 이것도 언젠가 지나가겠지... 나는 이렇게밖에 못하는 말을 저렇게 멋있게 풀어내다니. 역시 작가는 다른가보다. 개인적으로 비오는 순간을 좋아해서 더더욱 마음에 들었던 문장이다.


 "폐기된 좌우명 중에 '너에게서 나온 건 너에게로 돌아간다'라는 구절이 있다. 지나고 보니 그 말을 선행에 따르는 보상이 아니라 무분별한 악감정에 대한 경고로 이해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나에게만 힘센 사람이 되자는 다짐, 그게 바로 '미워하지 않을 용기'였다." p.108 미워하지 않을 용기

"하지만 나는 너무나 수평적인 가족관 때문에 되바라졌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부모님은 진작' 네 멋대로 살아라'라며 포기했는데, 의외로 또래 친구들이 열띤 말을 보탰다. 부모님은 절대적 공경의 대상이고 드높은 태산일 뿐 시시때때로 클라이밍하는 암벽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이 더 높아지려고 나를 낳지는 않았다고 믿었다. 본인만큼, 본인보다 훌륭한 자를 원한다면 자식이 크는 것보단 거울을 보는게 빠를 것이었다. 게다가 본인 같은 자식만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애였다. 본인 같은 자식을 미워한대도 자기 혐오일 테니 그 또한 나와 해결을 볼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부모님 자신의 과제이고 삶의 어떤 부분은 천 년의 효도로도 풀어줄 수 없다." p.117 루브르와 움막 사이

 

 명문이다. 수평적인 가족관 속에 자라진 않았지만 부모가 특정한 자식을 더 예뻐하거나 미워하는 것. 둘다 자기애와 자기혐오로 부모의 감정이지, 자식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천 년의 효도로도 풀어줄 수 없다'는 말 너무 공감한다.


"하지만 당하다 보니, 직장 내 괴롭힘의 기전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불편을 지속하려는 사람은 없다. 회사에서는 모두가 자신에게 닥쳐오는 오만 가지 나쁜 일들을 피하려고 발악한다. 그러나 내게로 향하는 괴롭힘에는 현상만 있고, 결과로 따르는 불이익이 없었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는 더없이 손쉬운 콘텐츠인 것 같았다. 가해자는 나를 통해 본인의 공적 권능과 사적 권능을 듬뿍 확인하고, '일하는 기분'과 '기강 잡는 기분'을 동시에 챙겼다."p.144 인간에게는 모양이 없다


""세상에 너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니? 그런 사람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어."
 순간 실제로도 주전자를 닮은 부친이 아라비안나이트의 요술 램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도 아빠를 문질러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펼친 양탄자 같은 위로에 올라타자 심신이 가벼워졌고, 눈물에 젖어본 적 없는 보송한 어린이가 된 것 같았다." p.185 너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어

 

 우리 아빠가 한 번이라도 이런 말을 해줬다면, 추억이 있었다면 나의 인류애는 좀 더 발전했을까? 눈물에 젖어본 적 없는 보송한 어린이가 된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


 "사실 내게는 사사로운 외출에 대한 명분보다 나갈 수도 있지만 스스로 안 나가고 있는 거라는 느낌이 필요했다. 이 생활을 감금으로 여기지 않을 근거가 있어야 갇혔다는 절망에서 탈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안되겠을 때엔 맷돌이를 보며 공연히 눈물을 찍었다. 내가 없으면 고양이 모양을 한 저 돼지의 밥은 누가 챙겨 줄까 앞이 깜깜했다." p.196 지금은 갓생방 중입니다

 "그러던 내가 《젊은 ADHD의 슬픔》 출간 후엔 갑자기 여기저기서 정중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책을 내긴 했어도 작가라는 호칭은 아직 어리둥절한 가운데, 1992년생 독자님들의 고민 상담 메세지가 이어졌다. 그분들 중 상당수가 작가님에 비해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며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동된 SNS 계정을 눌러보면 이미 나보다 훌륭히 살고 계시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어떤 분들께는 오히려 내가 인생 알차게 사는 꿀팁을 여쭙고 싶어질 정도였다." p.222 서른 판타지